황홀한 경주 100M: 올림피아슈타디온의 대결

황홀한 경주 100m: 올림피아슈타디온의 대결

황홀한 경주 100m: 올림피아슈타디온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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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슈타디온의 대결


베를린의 '올림피아슈타디온'은 독일 스포츠의 요람이요, 독일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세계적 경기장이다. 이 경기장은 한 자리에다 세 번이나 고쳐 지은 것인데, 처음 것은 취소된 1916년 올림픽을 위해 지은 것이고, 두 번째 것은 1936년 올림픽을 위해 히틀러가 큰 마음먹고 지은 것이다. 나치는 독일인의 자존심에 걸맞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웅장한 작품을 세계에 선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름까지도 제국의 운동장'이라고 명명하고 히틀러와 나치 수뇌부를 위한 특별 스탠드는 물론 11만 관중을 수용하는 12만 평방미터의 잔디광장까지 갖춘 초호화판의 스타디움이었다.

지금의 경기장은 2009년 IAAF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위해 2004년부터 대대적인 개조공사를 통해 세 번째로 선보이는 경기장인 셈이다. 지금 '올림픽 공원'이라고 불리는 이 경기장은 우리와도 인연이 깊어 1936년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의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2:29:19)하였고, 남승룡 선수는 동메달(2:31:43)을 딴 바로 그 경기장이다.

독일은 이번 선수권대회를 베를린 천도를 기념해 2005년에 꼭 열고 싶어했던 것인데, 헬싱키가 가로채 가는 바람에 4년이 지난 2009년에야 뜻을 이룬 것이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사상 유치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대회가 2005년의 10회 대회와 2011년 13회 대구대회였다. 10회 때는 유럽의 강호인 런던, 로마, 베를린, 헬싱키가 최후까지 경합을 했던 것인데, 육상의 명문 헬싱키가 유치에 성공하였다. 가장 약세로 보였던 헬싱키가 성공한 배경은 지난날 눈부셨던 핀란드 육상의 전통에 있었다. 헬싱키로 말하면 1930년대 세계 육상의 중심지였고 지금까지도 세계 육상인들의 우상인 콜레마이넨, 누르미, 리톨라가 활약했던 무대요, 또 몇몇 집행이사들에게는 젊은시절 벅찬 가슴으로 달리던 향수가 깃든 곳이었다. 결국, 런던의 권위도, 로마의 역사도, 베를린의 경제력도 헬싱키의 전설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11년의 대구대회 역시 유치경쟁이 치열했던 경우였다. 처음 대회 신청을 한 도시는 샌프란시스코를 포함하여 7개 도시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와 브리즈번, 대구가 남아 경합을 벌였는데, 세인의 예상을 뒤엎고 한국의 대구가 유치에 성공하였다.

2005년, 박상하 체육회 부회장이 처음 유치계획을 발표했을 때만해도 회의적이었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하고 싶다고 아무 도시나 개최할 수 있는 대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의 지명도, 일반 관중의 육상에 대한 이해와 인기도가 높아야 하고, 회장 외 26명으로 구성된 집행이사회의 과반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일반관중의 육상에 대한 인기도는 대회 유치에 절대적인 요건이다. 지금까지 집행이사들은 관중이 없는 도시에서 이 대회 개최를 동의해 준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관중의 육상에 대한 이해 정도도 우리는 문제였다. 예컨대 스타디움의 관중이 지켜야 할 중요한 육상 예절의 하나가 경기 출발 전 절대 정숙인데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게 우리 실정이다. 출발신호인 총소리가 나기 직전에는 기침도 참아야 하는 게 기본적인 매너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칼 루이스는 그의 가시에 이런 글까지 남겼다.

“100m 결승 출발 때, 서울의 7만 관중이 얼마나 떠들어 대는지 참을 수가 없었다. 한국의 관중은 내가 겪은 최악의 올림픽 관중이었다."

따라서 꼭 하겠다면 이런 약점을 보완한 2013년 이후에 유치하는게 정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박상하 부회장의 열성과 김범일시장을 중심으로 한 대구시민의 열망이 대단하였다. 2007년, 실사단이 처음 현지를 방문했을 때 시민들이 보여준 관심과 열의는 아마도 IAAF가 처음 경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집행이사들은 우선 김범일 시장이나 대구 시민이 보여준 열정에 압도 당했다. 특히 카트에 가득한 80만 대구 시민의 유치 지지서명을 본 집행이사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또 그때 대구가 한 각종 프리젠테이션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일류급이었다.

후의 얘기지만 2007년 7월, 케냐의 몸바사에서 투표 직전, 대구가 한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은 모스크바나 브리즈번의 일류를 누르고도 남을 초일류였다. 모스크바, 브리즈번이 이신바예바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을 동원하여 화려하게 연출하였지만, 대구의 세련된 예술성 앞에는 빛을 잃었던 것이다.

대구 시민의 열정, 김 시장의 인간적 매력과 리더십, 초일류 프리젠테이션 등 우리의 강점은 'Taegu, Korea' 라는 핸디캡, 나아가 육상비인기 국가라는 치명적인 하자마저 극복하고 세계의 웅도 모스크바와 지상낙원이라는 브리즈번까지도 물리치고 대구가 대회 유치에 성공토록 만든 것이다.

또, 유치위원장 유종하 전 외무부 장관의 활약을 빠뜨릴 수 없다. 그의 유창한 영어 구사능력과 재외공관장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대회 유치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해외 공관의 역할이 컸던 배경에는 IAAF의 쓰라린 경험이 사실은 한 몫을 하였던 것이다.

1997년, 아테네에서 치른 제6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원래 멕시코시티가 먼저 어렵게 유치한 대회였다. 그런데 얼마 후의 멕시코 대선 결과 야당이 집권하는 바람에 대회를 반납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대회는 임박하였는데 대회를 맡을 적임 도시가 없어 IAAF는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런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정치가 스포츠에 영향을 줄 여지가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항상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 세계 공관장이 하나같이 서울도 아닌 대구를 위해 진력하는 것을 본 집행이사들은 우리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대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할 대목이 있다. 애초에 뜻과 비전이 없었으면 대구의 행운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조해녕 전 대구시장. 그는 시장 재임시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대구 유치를 처음으로 발의한 사람이다.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둘만 들라면 아마도 선견력과 용기가 아닐까 싶다. 세상사 앞을 못 내다보면 망치기 십상이요, 용기가 없으면 무슨 일이든 일굴 수가 없는 법이다. 특히 지혜는 남에게서 빌릴 수도 있지만 용기는 빌릴 수도 없다. 대구의 장래를 지그시 내다보고 있던 조 전시장의 비전이 없었다면, 말도 안 되는 대구유치를 밀어붙일 용기가 없었다면, 시민의 열정도, 초일류 프리젠테이션도 없었을 것이요, 2011대구 대회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009년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 베를린 대회는 독일이 두 번째로 갖는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즉 1993년 제4회 슈투트가르트 대회가 첫 번째이고, 16년 후인 2009년에 다시 이 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첫 번째인 슈투트가르트 대회에는 187개 참가국에서 1,700명의 선수와 임원 800명, 기자단 2,000명이 참가한 역대 최대 대회였다. 한국은 그동안 선수권대회에 꾸준히 참가하였으나 결과는 매우 부진하였다. 유일하게 슈투트가르트 때 김재룡 선수가 마라톤에서 4위, 이진택 선수가 높이뛰기 결선조까지 진출하였으나 6위에 그쳤다. 그때 한국선수단장이 인천육상연맹의 곽재영 회장. 그 정도의 성과를 올린 것도 곽 회장이 경기 기간 중 어떤 저녁행사에도 참가하지 않고 오직 선수관리에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지난번(2009년) 베를린 대회에는 200개 참가국에서 역대 최다인 1,894명(남자 1,038, 여자 856)의 선수와 임원 1,587명, 기자단 3,500명이 참가한 최대 선수권대회였다.

이 대회의 특징의 하나는 전례 없는 마라톤 코스를 선보였다는 점이다. 즉,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베를린 명소를 연결한 10km 루프(loop)코스는 도로 연변에 많은 관중을 모았고, 사무실에서, 공원에서, 혹은 자기 집 2층에서 마라톤의 묘미를 맛보게 하겠다는 점이다. 2011년 대구 대회 마라톤도 국채보상공원을 출발하여 황금네거리와 수성못을 경유, 삼덕동, 중앙로를 연결하는 루프코스가 될 것이다. 또 베를린 대회에 한국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삼성그룹이 AAF 공식후원사(Official Sponsor)가 되었다.

베를린 대회 남자 100m 준준결승이 대회 첫째 날인 8월 15일에 준결승은 2일째인 16일 저녁 7시 10분에, 그리고 결승은 두 시간 후인 16일 저녁 9시 30분에 계획되어 있었다.

준준결승에서 볼트는 안티구아의 다니엘 베일리(Daniel Bailey)에게 1등 자리를 내주고 2등으로 들어오는 여유까지 보였다. 결승 당일은 전형적인 북구의 여름밤에 기온 26℃, 습도 39%, 바람은 0.9m/sec였다.

베를린의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제12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는 예상대로 9만 관중이 스탠드를 꽉 메웠다. 세계의 관심은 베이징 때와는 달리 오직 한사람에게 쏠리는 것 같았다. 희대의 천재 우사인 볼트가 과연 얼마나 달려줄 것인가? 소문대로 대망의 100m 달리기 경주에서 9.5초는 돌파될 것인가? 갖은 예측과 뜬소문까지 떠돌아 100m 출발선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근처 공기는 금방이라도 뻥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침내 준비신호와 함께 여덟 명의 선수들이 가지런히 구부렸다. 바로 옆 선수의 심장 박동이 좌우로 전달되어 그 순간 공명이라도 일어난 듯 선수들은 하나가 되었다.

세상에는 절대시간, 절대공간이라는 게 있다. 검술의 달인끼리 칼끝을 마주할 때, 그곳엔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엔 오로지 나만이 있기 때문이다. 공간도 시간도 초월해버린, 오직 나의 의식만이 살아 있는 그런 시간과 공간. 한 달인이 상대를 벨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칼이 빨라서가 아니라 내 의식이 상대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그곳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절대시간, 절대공간이라고 한다면, 100m 결승 출발 선상의 선수들이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지금이 절대공간, 절대시간이 아닐까?

시간도 공간도 없는, 오직 심장의 울림으로 내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그런 상태에서 선수들은 뛰쳐나갈 것이다. 나를 뛰쳐나가게 하는 것은 총 소리가 아니라 생생한 나의 의식이다. 이것이 100m 고수들의 출발일 것이다.

준비-탕!

탕' 하는 소리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

경주는 이미 끝나 있었다.

9.58! 또 세계신기록!

스크린에는 우사인 볼트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타이슨 게이는 2년 전 오사카 세계선수권에서 우사인 볼트를 누르고 100m, 200m, 400m 릴레이까지 석권한 3관왕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 그는 9.71를 기록해 100m 역사상 3번째 최고기록을 수립하면서도 은메달에 그쳤다. 이 기록은 볼트의 9.69, 9.58만 없었으면 사상 최고기록으로 지금의 볼트가 누리고 있는 영예를 그가 누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이 기록은 100m 왕국 미국육상 100년 역사를 통하여 최고의 기록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인의 그림자에 가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사인 볼트가 1년만 늦게 나왔어도 타이슨 게이의 처지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떠오르는 태양 앞에 보름달은 빛을 잃는 법!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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